흑백 음악회
                                                                       변호사 이인구                  

 

변호사 이인구

내가 진해에 처음 갔던 것이 1979년 경으로 기억한다 같이 공부하던 친한 선배가 해군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만나러 간 길이었다 창원과 진해 사이에는 장복산이 가로막혀 그 산 위로 꼬불꼬불 버스가 달렸다 고개를 내려 가는 길에 진해 시가지가 조개껍질처럼 나타났다

 벚꽃으로 유명한 여좌천을 지나 이르는 중원로타리 부근은 당시 진해의 중심가였다 이제는 번화가가 동쪽으로 옮겨져 중원로타리 부근은 '철 지난 바닷가' 신세가 되었다 나는 이런 고즈녁한 분위기가 좋다 화려하였던 옛날을 추억하면서 곱게 늙어가는 여인네를 떠올리는 곳

 로타리 부근에는 귀화한 중공군 포로가 열었다는 중국집 원해루가 있고 벚꽃방을 만들어 히트시킨 진해제과점이 있다 건물 자체가 문화재가 될 진해우체국도 지척이다

이 곳에 숨은 듯이 자리잡은 흑백다방. 이제는 더 이상 다방은 아니고 문화공간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 젊은 대학생 시절, 이 곳을 찾았을 때 안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겠지만 기억에는 없다

당시 2층에는 화가였던 주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20대 대학생은 60대 초로初老의 중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아직 그대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 공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도 예전 주인의 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의자를 비롯한 소품들이 모두 그 옛날의 그 물건들이다 오래된 책, 양판, 악기, 집기, 유 화백의 그림들..그 모습이 이채로왔는지 영화 촬영장소로도 쓰였다 하네

이 날은 흑백에서 유화백 18주기 추모 특별 연주회가 열렸다 곡목도 모두 유화백이 평소 즐겨듣던 곡으로 골랐다 한다

1924년생이니 지금 살았다면 94세, 그 시절 음악을 전공한 분도 아닌데 이런 음악을 즐겨 들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나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이야 워낙 알려진 곡이라 하더라도 나머지 곡들은 너무나 생소하다

 피아노는 흑백 주인 유경아씨가 맡고 바이올린은 이미원이라는 분이 맡았는데 이미원씨는 유화백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다

그래도 흑백이 문화공간으로 남는데 취지를 같이 하여 재능기부로 무료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 한다

청중은 20여명.. 무대 앞 줄에 앉으니 연주자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예전 귀족들이 연주자들을 집으로 불러 연주를 감상할 때의 기분이 바로 이럴 것인가?

술도 세 사람이 마시면 신선의 분위기이지만 열 사람이 마시면 시장바닥이 되듯이 무슨무슨 홀에서 수백명 관중의 일원으로서 듣는 음악과는 질적으로 다른 연주회였다

이런 연주회를 무료로 감상하게 해 준 유경아씨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 유럽에서 공부를 하고 왔지만 지방 소도시 진해에서 부모가 물려준 흑백이라는 공간을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분투 중이라 한다

이런 사람이 있기에 문화가 전승되고 발전이 되는 것이겠지

어느 문인이 그녀를 '피아노를 빼고는 아무 것도 아닌 여자'로 불렀다니 그녀의 삶이 짐작이 간다

 그녀는 이 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악보도 없이 연주하였는데 아마 수천번도 더 이 곡을 두드렸을 것이라 했다

 어린 날, 그녀가 <월광>을 연습하고 있으면 유화백이 그림을 그리러 올라가다 말고 등 뒤에서 연주를 들었다 한다 유화백의 최고 애청곡이었나 보다

<월광>은 예전 국민학교 교과서에, 베토벤이 산책 중 눈먼 소녀의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고 그 집으로 들어가 달빛을 보며 피아노를 쳤다는 등의 작곡 경위가 나와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곡은 몰랐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추모 음악회여서인지 이 곡을 연주하면 지금도 등 뒤에 아버지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말을 하였다

2시간 여의 연주회는 30분이 지났나 할 만큼의 몰입도를 보이며 끝났다

바람부는 중원로타리를 걸어 나오며 모처럼 문화의 향기를 흠씬 마신 듯한 흡족함을 느꼈다